영화 조커 1편 (2019) 광대의 탄생, 사회적 폭력, 정체성 붕괴라는 키워드로 깊게 해석하며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기까지의 심리와 사회 구조를 분석한 장문 리뷰.
영화 조커 연출 및 출연진
감독
- 토드 필립스 (Todd Phillips)
- 대표작: 행오버 시리즈, 워 독스
- 특징: 장르적 전환, 사회 비판적 시선, 인물 중심 서사
주요 출연진 및 배역
-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 배역: 아서 플렉 / 조커
- 사회로부터 고립된 남자가 광기 어린 상징으로 변모하는 인물
- ※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 로버트 드 니로 (Robert De Niro)
- 배역: 머레이 프랭클린
- 대중의 조롱을 상징하는 토크쇼 진행자
- 자지 비츠 (Zazie Beetz)
- 배역: 소피 듀몬드
- 아서의 상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웃
- 프랜시스 콘로이 (Frances Conroy)
- 배역: 페니 플렉
- 아서의 어머니, 왜곡된 모성의 상징
주요 조연 및 인물
- 브렛 컬런 (Brett Cullen)
- 배역: 토머스 웨인
- 고담의 엘리트 정치인
- 더글라스 호지 (Douglas Hodge)
- 배역: 알프레드 페니워스
- 마크 마론 (Marc Maron)
- 배역: 진 우플랜드
- 셰이 위검 (Shea Whigham)
- 배역: 고담시 형사
영화 조커 작품 정보 한 줄 요약
《조커》는 히어로의 부재 속에서 탄생한 빌런의 초상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분노와 소외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심리 드라마다.
1. 조커 “당신은 웃고 있지만, 나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2019)는 전통적인 히어로 영화의 외피를 쓴 채, 사실은 한 사람의 정신과 정체성이 산산조각 나기까지의 과정을 극도로 집요하게 따라가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배트맨 세계관의 유명한 악당 ‘조커’의 오리진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보면 이 영화는 “악당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버려지고, 끝내 어떤 선택까지 밀려나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아서 플렉은 스스로 코미디언을 꿈꾸는 남자이지만, 동시에 유별나게 취약하고,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웃기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삶에서 웃음을 거의 빼앗긴 상태로 살아갑니다.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어머니를 돌보며 근근이 버티는 그의 일상은 이미 한계점에 가까운 균열투성입니다.
영화의 제목 “JOKER”는 배트맨의 숙적을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퍼 히어로의 라이벌’이 아니라 “광대라는 존재가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웃음을 주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가장 쉽게 조롱당하고,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되기 쉬운 얼굴. 이 영화는 그 광대의 가면이 어떻게 고정된 표정으로 굳어지며, 마침내 폭력의 상징이 되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2. 고담의 공기 – 폭력은 주먹 대신 ‘무관심’의 얼굴을 하고 온다
조커의 배경이 되는 고담 시티는 이미 여러 배트맨 작품에서 등장했던 익숙한 도시이지만, 여기서의 고담은 한층 더 사회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쓰레기가 치워지지 않아 거리에 쌓여 있고, 복지 예산은 삭감되고, 대중교통 안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도시입니다. 누구나 예민하고, 누구도 여유가 없습니다.
이 도시에 흐르는 가장 거대한 폭력은 꼭 칼과 총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아서가 겪는 폭력의 상당수는 무시, 냉소, 시선, 제도적 차별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직장에서 동료는 대놓고 그를 따돌리고, 거리의 아이들은 이유 없이 그를 때리고, 지하철의 낯선 남자들은 그를 장난감처럼 취급합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존재를 “웃음거리”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끈질기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고담은 특정 도시를 지칭한다기보다, “공감 능력이 마모된 사회”의 상징입니다. 누구도 크게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전체적으로는 누군가를 망가뜨릴 만큼 거친 공기가 돌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안에서 가장 먼저 부서지는 사람은 언제나 아서처럼 이미 한 번 무너져 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3. 아서 플렉 – 이미 무대 뒤에서 쓰러져 있던 광대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아서의 일상은 “힘들다”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정신질환으로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고, 뜻하지 않은 웃음 발작을 설명하는 카드를 들고 다녀야 하는 사람입니다. 길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와도 그건 유머가 아니라 증상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그는 카드에 이렇게 적어 놓습니다. “나는 병 때문에 웃는다. 불편하시겠지만 이해해 달라.”
여기에 더해, 그는 노모를 돌봐야 하는 가난한 가장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해피(Happy)”라고 부르며 애정 어린 말을 건네지만, 동시에 아서에게는 엄청난 압박과 의존의 대상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웃기고, 더 열심히 버티려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그의 바탕 상태가 이미 금이 간 유리처럼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가난, 정신질환, 가족사, 사회적 고립이 동시에 얽힌 그의 삶은 작은 충격에도 부서질 준비가 되어 있는,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물입니다. 영화는 이 균열 위로, 사회적 폭력이 어떻게 계속해서 추를 달아주는지를 보여줍니다.
4. 웃음을 강요받는 사람 – “나도 웃기고 싶은데, 아무도 안 웃는다”
아서가 꿈꾸는 직업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입니다. 그는 노트에 농담을 적어 보지만, 실제로 그 농담들은 어딘가 기묘하고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날 봤을 때 웃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 지금은 내가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같은 문장은 웃기다기보다 슬픕니다. 그의 유머는 다른 사람의 일상과 맞닿아 있지 않고, 자기 고통의 내부에서만 맴도는 언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아서는 무대에 서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TV 쇼에 나가 박수받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습니다. 이 꿈 자체는 너무나 평범한 욕망이지만, 문제는 아서에게 그 꿈으로 가는 길이 사회적 지지와 연습의 시간이 아니라, 조롱과 이용의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웃음을 주는 직업인데, 정작 그 자신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얼굴. 이 아이러니가 쌓이고 쌓이면서, 아서의 내면에서는 “나는 왜 이렇게까지 애쓰는데 아무도 웃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나는 애초에 웃길 수 있는 사람인가?”로, 나중에는 “나는 애초에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을 자격이 있나?”라는 의심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이 의심이 극단으로 뻗어 나가는 순간, 정체성 붕괴의 시작점이 됩니다.
5. 제도와 복지의 붕괴 – 상담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서에게 세상과 연결되는 거의 유일한 공식 통로는 사회복지 상담입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상담사를 만나 약을 처방받고, 최소한의 대화와 관심을 받습니다. 이 상담조차도 완벽한 이해의 장은 아닙니다. 상담사는 피곤해 보이고, 질문은 매뉴얼 같으며, 깊은 공감보다는 기계적인 체크에 가까운 장면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에게 이 상담은 그나마 “나를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지 예산이 삭감되면서 이 프로그램이 중단됩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린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어. 약도 처방해 줄 수 없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합니다. “사실 나도 네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고 있었던 것 같지 않아.”
이 장면은 제도의 폭력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일상이 그 제도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을 때, 제도가 사라지는 일은 그냥 숫자가 줄어드는 정책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마지막 창구”가 사라지는 사건입니다. 이 이후의 아서는 더 이상 약을 구할 수 없고, 감정 조절은 무너지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집니다. 사회가 “예산 절감”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일이, 한 사람에게는 정체성 붕괴의 가속 페달이 되는 셈입니다.
6. 지하철 살인 –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첫 순간
영화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지점은 유명한 지하철 장면입니다. 아서는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뒤 울적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술 취한 남자 셋이 여성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서는 특유의 웃음 발작 때문에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이 곧바로 폭력의 표적이 됩니다.
남자들은 아서를 장난감처럼 차고 때리며 조롱합니다. 그 순간, 아서는 어쩌다 손에 쥐게 됐던 권총을 꺼내 발포합니다. 셋 중 두 명은 곧바로 쓰러지고, 나머지 한 명은 도망치려다가 계단에서 여러 발의 총을 맞고 살해됩니다. 이 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관객이 이미 아서의 약함과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의 공포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서는 분명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됩니다. 그는 정당방위를 넘어, 도망치는 이를 쫓아가까지 쏩니다. 이 과잉 대응은 단순한 우발적인 행동이라기보다, 그동안 그가 쌓아온 모든 모멸감, 분노, 수치심이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 도시는 아서를 모르는 상태로 “지하철 살인 사건”을 정치적 상징으로 소비하기 시작합니다.
7. 사회적 폭력의 역전 – “광대 가면”이 계급 분노의 아이콘이 되다
지하철에서 살해당한 세 남자는 단순한 시민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자 계층, 특히 웨인 기업과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건은 곧 “가난한 광대가 부자들을 쏘아 죽인” 사건으로 재구성되어 뉴스에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수년간의 불평등과 모욕을 견디던 서민 계층의 분노가 폭발한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이 광대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섭니다. 그 가면은 원래 아서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썼던, 거리 홍보용 분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후, 그 가면은 “부자에 대한 분노” “기득권에 대한 조롱” “체제에 대한 반항”의 상징으로 확장됩니다. 사람들은 그 가면을 쓰고 거리를 행진하며, 경찰차를 뒤집고, “우리도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외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정치적 상징화 속에서 정작 아서 본인은 이 운동을 조직한 적도, 지도한 적도, 의도한 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저 한 번 절망 속에 방아쇠를 당겼을 뿐인데, 사회는 그 사건을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편리한 아이콘으로 둔갑시킵니다. 개인의 폭력이 어느새 집단적 의미를 입고, 사회적 폭력과 뒤엉켜 버리는 장면입니다.
8. 어머니와 과거 – “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나?”
아서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뒤흔드는 또 하나의 축은 어머니와의 관계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그녀로부터 “넌 세상에 웃음을 줄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고 자라왔습니다. 그런데 병원 기록을 찾아보고, 과거의 서류를 뒤지던 아서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가정폭력과 학대를 당했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제대로 막지 못했으며, 아서가 입양되었을 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등장합니다.
이 진실은 아서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듭니다. “나는 누구의 아들인가?”, “나는 애초에 사랑받은 적이 있었나?”, “내 기억은 어디까지 진짜고, 어디부터 거짓인가?”. 그가 어머니를 통해 쌓아왔던 ‘나는 특별한 아이야’라는 위안이 산산조각 나면서, 아서는 자신을 보호해 주던 마지막 내적 서사를 잃습니다. 그 서사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바로 분노와 공허입니다.
결국 아서는 어머니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입니다. 이 사건은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폭력이지만,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인생을 설명해 주던 마지막 이야기와의 단절입니다. 어머니가 상징하던 것은, 현실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래도 너는 괜찮은 아이야”라고 말해 주던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를 스스로 지워버린 순간, 아서는 “조커”라는 새로운 정체성의 빈자리를 손에 넣습니다.
9. 머레이 쇼 – 조롱당하던 관객이 카메라 앞의 피조물이 되는 순간
아서의 오랜 꿈은 TV 코미디 쇼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것입니다. 그는 머레이를 존경하고, 머레이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가 TV에 등장하는 방식은 상상과 정반대입니다. 클럽에서 어색하게 스탠드업을 하던 그의 모습이 몰래 촬영되어, “웃긴 게 아니라 민망해서 웃음이 나오는 실패 영상”으로 방영됩니다.
머레이와 관객들은 아서를 진지한 코미디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를 하나의 콘텐츠, 웃음거리, 소비 가능한 웃음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무대에 오른 사람을,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웃음의 주체”가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인 셈입니다. 이 순간, 아서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나는 어디를 가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이 실패가 완전한 끝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굴욕적인 노출 덕분에, 아서는 역설적으로 머레이 쇼의 “특집 에피소드”에 초대됩니다. 방송국은 시청률을 위해, 머레이는 자신이 능숙하게 조롱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해서 아서를 부릅니다. 즉, 아서에게는 인생 최대의 기회인 초대장이, 방송국 입장에서는 가볍게 소비할 ‘기괴한 손님’ 섭외에 불과합니다.
10. 조커라는 이름 – 정체성이 스스로를 선택하는 순간
생방송을 앞두고, 아서는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광대 분장으로 덮습니다. 평소의 초라한 분장이 아니라, 훨씬 또렷하고 과감한 색깔로 칠해진 얼굴입니다. 그는 양복을 차려입고, 계단을 춤추며 내려옵니다. 이 장면은 그동안 우리의 눈에 “불쌍한 남자”로 보이던 아서가, 비로소 자신의 삶의 연출자가 되는 첫 순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향해 소파에 앉은 그는, 머레이가 묻는 이름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커라고 불러 주세요.” 그동안 사회가 그에게 붙여온 수많은 이름들 – 정신병자, 실패한 코미디언, 문제 환자, 살인자 – 대신,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이름을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그 이름은 물론 건강한 의미의 자기 정체화라기보다, 완전히 뒤틀린 방식의 자기 승인에 가깝습니다.
“조커”라는 이름은 단순한 예명 이상입니다. 그 이름 속에는 “나는 당신들이 웃어 왔던 그 모든 조롱의 얼굴이자, 이제는 당신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쇼를 끝내버릴 얼굴이 될 것이다”라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광대의 가면이 더 이상 관객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관객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첫 순간입니다.
11. 생방송 스튜디오 총격 – 사회적 폭력에 대한 왜곡된 역습
머레이 쇼 클라이맥스에서 조커는,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쏟아냅니다. “여러분 같은 사람은, 저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세요?”라고 묻고, 사회가 자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조롱하고 버려왔는지 폭로합니다. 머레이는 이를 또 하나의 토크 콘텐츠로 받아들이려 하지만, 조커의 분노는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지점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마침내 그는 생방송에서 머레이를 총으로 쏩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전혀 예상 못한 전개도 아닙니다. 영화는 내내 우리가 이 지점을 직감하도록,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일관되게 아서의 감정을 쌓아 왔습니다. 머레이는 사회적 폭력의 얼굴 – 웃으며 타인의 고통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미디어의 상징 – 을 대표합니다.
조커가 머레이를 쏜 행위는, 원인과 맥락을 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명확하게 묻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서 같은 사람을 농담거리로 삼아왔는가?” 머레이의 죽음은 사회적 폭력이 거꾸로 되돌아와 폭발한 사건입니다. 그 방향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수용할 수 없을 뿐, 그 폭발의 연료를 채운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무시와 조롱의 층이었습니다.
12. 광대 반란의 밤 – 개인의 붕괴가 집단의 카니발로 변할 때
머레이 쇼에서의 총격 이후, 고담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미 거리 곳곳에 쌓여 있던 불만과 분노는, “조커”라는 얼굴을 중심으로 폭발합니다. 경찰차는 불타고, 사람들은 광대 가면을 쓰고 거리를 점령합니다. 이 폭동은 누가 계획한 혁명이라기보다, 오랜 혼란과 억압이 한꺼번에 분출된 집단적 카니발에 가깝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조커는 경찰차에 실려 가다가, 교통사고로 차가 전복되며 다시 세상 위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차 위에 올라가, 피를 입술에 발라 더 과장된 미소를 그립니다. 이 장면은 “조커라는 캐릭터”가 완성되는 순간이자, 개인의 정체성 붕괴가 집단적 상징의 탄생으로 뒤바뀌는 장면입니다.
이제 조커는 더 이상 외로운 남자가 아닙니다. 그는 군중의 환호와 박수, 폭력의 쾌감 속에서 어떤 뒤틀린 형태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 인정은 사랑도 아니고, 존중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서에게는,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감각입니다. 정체성 붕괴의 끝은, 이처럼 비극적인 방식의 탄생으로 연결됩니다.
13. 정체성 붕괴 –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감각이 ‘나는 아무거나 될 수 있다’로 바뀌는 순간
영화 내내 아서는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으려 애씁니다. “나는 희망을 주는 광대다”, “나는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언젠가 인정받을 코미디언이다”, “나는 사실 부자의 숨겨진 아들일지도 모른다” 같은 서사들이 순서대로 등장하지만, 하나씩 무너집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거나, 최소한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내려놓게 됩니다.
정체성이 붕괴된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공허와 무감각만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렇다면 나는 아무거나 될 수도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이 함께 들어옵니다. 더 이상 ‘착한 아들’일 필요도 없고, ‘착한 시민’일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기대했던 역할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때때로 제한 없는 폭력과 파괴의 판이 됩니다.
조커라는 자아는 바로 이 빈자리에 들어옵니다. “세상이 나를 농담거리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내가 세상을 농담거리로 만들겠다.” “나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이제 진지하게 누구도 대하지 않겠다.” 이 뒤틀린 결론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심리적 궤적을 따라온 관객에게는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겠다”는 아주 묵직한 이해를 남깁니다. 이 이해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 역시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14. 사회적 폭력과 개인의 책임 – “우리가 만들었다” vs “그래도 그는 선택했다”
조커(2019)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조커는 사회가 만든 괴물인가, 아니면 결국 스스로 선택한 악인가?”
영화는 분명 아서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과, 사회적 폭력, 제도적 무관심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복지 삭감,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 계급 격차, 미디어의 조롱과 폭력, 일상적인 괴롭힘. 이 모든 요소가 아서를 한계까지 몰아붙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조커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그의 행위를 전적으로 면책해 주지도 않습니다. 아서는 어머니를 죽이고, 지하철에서 도망치는 사람을 쫓아가 쏘고, 머레이를 생방송에서 살해합니다. 이 선택들은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생명을 완전히 수단화한 자기 결정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힘들었으니 이해해도 된다” 수준으로 쉽게 봉합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론을 관객에게 밀어넣습니다. “사회가 한 사람을 여기까지 몰아붙였다는 사실과, 그가 결국 폭력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동시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쪽만 붙드는 순간, 다른 쪽의 불편한 진실이 튀어나옵니다. 이 불편함 자체가, 조커라는 영화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15. 계단 위의 춤 – 타락이자 해방, 몰락이자 탄생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바로 계단 위의 춤입니다. 초반부에 아서는 그 계단을 축 처진 어깨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힘겹게 올라갑니다. 현실의 무게가 그의 등을 짓누르고, 머리는 늘 숙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커가 된 이후, 같은 계단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됩니다.
이제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춥니다.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몸을 흔듭니다. 이 몸짓은 자유의 표현처럼도 보이고, 완전히 망가져버린 자의 춤처럼도 보입니다. 이 이중적 감정이 이 장면의 힘입니다. 그가 느끼는 해방감은 분명 실제일 것입니다. 더 이상 남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해방감이 향하는 방향은, 명백히 타인에게 위협이 되는 폭력의 길입니다.
계단은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혼란과 폭동이 기다립니다. 조커는 그 계단 한가운데에서 춤을 춥니다. 추락과 비상, 몰락과 탄생, 타락과 해방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는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오래도록, 고담이라는 도시의 공기 속에 남게 됩니다.
16.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
조커(2019)를 보고 난 뒤에 남는 감정은 단순한 공포도, 단순한 연민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서 플렉이라는 남자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동시에, 그가 저지른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이 양가적인 감정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마음 한편이 오래도록 불편하게 남습니다.
그 불편함 속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몇 명의 아서가 있을까?”
당장 폭력으로 폭발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
“나는 늘 웃음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 삶을 설명해 줄 이야기”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커는 악당의 기원을 다룬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폭력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농담, 무심코 던진 말, 제도적 예산 삭감, 복지의 축소, 미디어의 조롱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어느 계단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상을 남깁니다.
그 웃음이 진짜로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이길 바라는 마음,
그 웃음이 누군가를 향한 총성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이 영화는 조용히 속삭이는 듯합니다.
“당신이 오늘 스쳐 지나간 한 사람의 얼굴이,
어쩌면 내일의 조커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조커(2019)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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